소설소재잡담

여덟의 나이가 되기 이전까지

하양녹 2022. 11. 12. 08:14

1. 내가 다닌 어린이집은 빈 도시락통을 가져가면 점심시간에 그 통을 식판 삼아 밥을 나눠줬다. 나는 아직도 그 선생이 왜 그리 신경질적이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나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모호하고 예절에 관한 교육이 미흡한 어린이였다. 부모님이 둘 다 일로 바쁘셔서 나에게 그런 기본적인 것을 가르쳐줄 어른이 없었다. 당시 다섯살쯤인 내가 밥통에서 밥을 꺼내주던 선생에게 한 손으로 도시락통을 건넨 게 그 선생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내가 니 친구야?"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갑자기 친구냐고 물어서... 어른에게 뭔가를 내밀 땐 두 손을 쓰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싸우자는 말투로 말하다니... 그게 지금까지 기억에 또렷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내가 어른에게 받은 제일 큰 상처였다. 나는 나와 관련된 기억만 있으니 그 일이 있기 전 그 선생이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움 받는다는 걸 느낀 가장 선명한 사건이었다.

2. 어린이집 미술시간이었다. 바닷속을 그려 보자는 말에 나는 즉각적으로 해변을 연상했다. 파란 크레파스로 물결을 그리고, 노란 크레파스로 모래사장을 그리고... 야자수까지 있는 풍경을 떠올렸다. 거기까지 그리니까 선생이 "바닷속을 그리랬잖아! 바닷속인데 파도가 왜 있어!" 하고 핀잔을 줬는데, 당시에는 고함을 친 것 같았는데 지금 떠올리면 핀잔 정도였나 가물가물하다. 내 옆의 아이도 나를 따라 비슷하게 그렸는데 일단 내가 선생 쪽에 가까워서 나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나의 인정욕구가 큰 이유가 이런 사건 때문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나의 욕구 때문에 이런 사건이 너무 크게 다가온건지... 어쨌든 그 선생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선 에피소드의 그 선생과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3. 어린이집에 다닐 때 동네친구가 한 명 있었다. 성은 기억 안나도 이름은 기억난다. 가명은 말순으로 하겠다. 말순은 그 당시 나름 넓은 아파트에 사는 조금 있는 집 애였다. 걔네 집에 한 번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그런 걸 부러워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천성부터 집순이인 나는 남의 집이 마냥 불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시키는 건 원체 다 했던... 자기 주관이라곤 없는 맹맹한 아이였나 보다. 공주님 놀이를 하자고 해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말순이를 봤고, 말순이가 드레스로 입으라고 준 검정색 긴 잠바도 입었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 건 그 어린 나이에마저 '지는 이쁜거 입고 왜 나는 이거 입으래...? 기분나쁘네... '라고 생각했던 게ㅋㅋㅋㅠ 정말 신기하지 않은가? ㅠㅠ어린 아이라서 그 자리에서 너랑 똑같은 거 입겠다고 떼를 쓸 수도 있는데 저렇게 생각만 하고 말았다는 게... 하자는 것도 다 하고... 딱히 말순에 대한 좋은 이미지도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특이한 애였던 것 같다...
그리고 문제의 그 날 "내일 너도 어린이집에 똑같은 거 입고 와!" 같은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그걸 새까맣게 잊고 있다가 저녁 아홉신가, 좀 늦은 시간에 기억이 나버려서 갑자기 엄마한테 떼를 썼다. 당장 내일 하얀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며 엉엉 울어제끼기 시작했는데... 나의 그 시절 가장 부끄러운 일화다. 이 시간에 열린 옷가게도 많지 않고... 돈이 없는 엄마는 상처를 좀 받았을 것이고, 마침 같이 있던 이모가 옷가게를 몇 군데 돌아 드레스 하나를 겨우겨우 사주셨다. 드레스를 받고 문제가 해결되어 안정감을 느꼈고 울음을 그쳤다. 내가 엄마였다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엄마의 진짜 감정을 알 수야 없는 노릇이다.
다음 날 나는 약속대로 드레스를 입고 통학버스에 올랐고, 태우신 선생님이 말순과 나를 보며 "오늘은 공주님이 둘이나 탔네~~" 하며 어린이의 고양감을 채워주셨다. 이때 말순에 대한 기억은 없다. 그냥 계획대로 하얀 드레스를 입었고 성취감을 느꼈다. 이 드레스는 훗날 집 옆에 있던 사진관에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도 입었는데.. 그 사진이 내 대학생때까지 집에 걸려 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 기억 이후로 그 드레스에 대한 애착은 기억나지 않는다...

4. 언니와 똥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했던 기억도 있다. 부끄러운 역사다.

5. 부모님이 운영하는 가게(슈퍼)에서 당시에 테이프처럼 말린 껌이 있었는데 그게 먹고 싶어서 훔친 적이 있다. 보석반지 사탕도 훔쳐보고... 왜 엄마에게 먹고 싶다는 말을 안했는지 모르겠다. 앞선 드레스 사건 때문이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떼를 썼던 그날도 엄마는 얘가 이런 적이 없다며 곤혹스러워 했다. 그 드레스는 어린 내가 '해야 하는 일' 같은 거였다. 내가 사사롭게 원하는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먹고 싶다. 하지만 혼날 것 같아. 혼나긴 싫어. 몰래 먹어야지.' 사고방식의 흐름이... 좀 무서운 아이였나..? 아직도 어린시절 일화는 의문이다. 오은영 박사님이라면 이 심리를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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